일본 여행 기본정보
추억의 영화를 한 편 봤다. 총천연색 화려함보다는 아스팔트처럼 울퉁불퉁함이 묻어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흐물거리는 기억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무엇인가가 내 머릿속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영화가 계속 이를 끄집어내려고 했기 때문. 하지만 즐거웠다. 유리창 너머로 빛나는 태양의 화려함에서 벗어나 그늘진 응달에 자리를 깔고 앉을 수 있는 여유로움 같은 느낌의 영화였기 때문. 추억이란 그렇다. 불편한 기억을 끄집어 내기에 다소 시간이 걸리고 힘들지만, 그 추억에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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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추억을 파는 여행이 있다. 햇살을 받아 영롱한 빛깔로 춤추는 대지, 그리고 그 위를 달리는 검은색 기차가 있다.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달리는 빛바랜 기관차, 그 경쾌한 발걸음처럼 보는 이에게도 아련한 추억을 선물한다. 오늘은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증기기관차를 직접 타볼 수 있는 시즈오카현 오이가와혼센(大井川鐵道本線)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에서는 증기기관차를 흔히 SL열차라고 부른다. 증기기관차의 영어식 표현인 'Steam Locomotive'에서 이니셜을 따와 'SL열차'라고 부르는 것. 또한, 죠키키칸샤(蒸気機関車)란 한자식 표현도 종종 사용되곤 한다.
시즈오카현 JR카나야역(金谷) 출구로 나오니 오이가와혼센 카나야역이 바로 옆에 있었다. 오이가와혼센은 현역에서 은퇴한 SL열차의 보존운행을 일본에서 처음 실시한 곳으로 일본 철도매니아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오이가와혼센은 카나야역에서 센즈역까지 총 40km 구간으로 현재 매일 1~2차례 SL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오이가와혼센 카나야역에서 일반열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신카나야(新金谷)역. 카나야역에서 한 정거장 떨어져 있는 역으로 SL열차 전시실과 쇼와시대나 볼 수 있는 일본 역사를 재현해 놓은 로코뮤지엄(LOCO MUSEUM)이 있는 곳이다. 신카나야역 맞은편에 있는 플라자 로코 안으로 들어갔다. 사쿠라애비나 와사비 등의 시즈오카 특산품을 파는 매장이 입구 근처에 있고, 매장 안쪽에 로코뮤지엄이 있었다.

로코뮤지엄 내부에는 운행을 멈춘 2대의 SL열차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뿌웅~' 기적소리를 내며 달릴 것 같은 SL열차는 전시실 한쪽에 진열되어 있었다. SL열차 바로 옆에는 50~60년대에나 사용되었을 것 같은 차량도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당시에는 센즈에서 이가와까지만 운행했음을 알리는 방향표시가 차량 옆에 적혀 있었다. 빨간색과 아이보리색깔로 칠해진 차량을 보니 마치 장난감 미니어처를 대형 크기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차량 내부도 견학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창문 아래에 놓인 2열의 벨벳풍 자주색 의자는 삐거덕거리는 느낌마저 추억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과 불과 몇십 센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비좁음이 왠지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이밖에 로코뮤지엄에는 지금은 보기 힘든 옛 역사를 재현한 풍경이나 SL열차 미니어쳐 콜렉션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로코뮤지엄에서 SL열차를 견학하고 다시 신카나야역으로 이동했다. 역사에는 이미 많은 관광객이 운집해 있었다. 지정된 시각이 되자 멀리서 증기를 내뿜는 열차 모습이 보였다. 거리를 조금씩 좁히며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SL열차를 보면서 왠지 나도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뿌우~'소리를 내며 솟구쳐 오르는 하얀색 증기와 검정색 기차 모습을 한 장의 사진에 담기 위해, 플랫폼에 모여든 관광객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기차에 올라탔다. 철제 손잡이를 양손에 잡고 높은 계단을 밝고 올라가 차량 내부로 들어갔다. 아치형태의 천장 중앙에는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오래된 선풍기가 달려있다. 목조로 만들어진 의자는 딱딱한 느낌의 겉모습과는 달리 앉아보니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침 비가 오고 있었다. 대지를 적시는 촉촉한 빗방울이 차창 밖에 몽글몽글 놓여 있는 것이 좋았다. 지정석이 아닌 것도 마음에 들었다. 어린아이처럼 이곳 저곳 다니며 앉아보고 싶었다.
'뿌우~뿌우' 소리를 내며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는 노랗게 물든 오곡이 빗물 사이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있었다. 또한, 시즈오카가 녹차의 산지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곳곳에 녹색의 물결이 파도 치고 있었다. 도시락을 가방에서 꺼냈다. SL열차에서만 맛볼 수 있다고 해서 로코뮤지엄에서 거금을 주고 구입했던 바로 그 도시락을 말이다. 사실, 도시락과 SL열차는 아무런 관련 없다. 흔하디흔한 마케팅이 그렇듯 지역특산물이 주재료인 도시락에 이름만 SL열차를 붙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데도 도시락을 사먹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SL열차 한정'이라는 문구가 주는 강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시락을 먹고 나자 제복을 입은 승무원이 등장했다. 표 검사가 주요한 업무일 텐데, 이곳에서는 열차승무원이 가이드역활까지 하는 것 같았다. SL열차의 발자취와 SL열차를 타고 갈 수 있는 주변 관광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노래 한 번 해봐'라는 요청에 기꺼이 마이크를 빼어드는 녹녹함마저 보여주었다. 그것도 하모니카로 흘러간 엔카송을 멋들어지게 불렀다. SL열차 전체가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느낌이었다.
40km를 1시간 30분에 달리는 기차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 누구도 안 타려고 할 것이다. 현대의 속도전에 익숙한 우리는 '빨리, 또 빨리, 그리고 빨리'를 외치며 신칸센처럼 열차의 속도를 올리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느린 열차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SL열차가 당당히 보여주었다. 아련한 추억의 향기와 함께 느림의 미학을 느끼기에 충분한 SL열차. 추억을 선물 받고 싶어하는 여행자에게 추천한다.
<여행 TIP>
오이가와혼센에서 운행되는 SL열차는 하루에 1~2차례밖에 운행을 안 한다. 발차 시각도 날짜에 따라 다른 경우가 종종 있으니, 반드시 예약할 때 해당 날짜의 목적지 발차시각을 확인해야 한다.
전 좌석 예약제로 운영되는 SL열차. 예약 방법은 전화와 홈페이지를 이용하는 것 2가지다. 전화는 오이가와혼센 예약과
SL열차를 이용할 경우 로코뮤지엄도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다. 로코뮤지엄은 오이가와혼센 신카나야역 인근 플라자 로코(PLAZA LOCO) 안에 있다. 입장료는 무료, 운행시간은 9:00~17: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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